검은 수풀로 뒤덮인 곶자왈. 회색조의 비양도 하늘. 짙은 회색 모래사장의 검멀레 해변. 김세연의 드로잉은 검다.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제주에 대해 떠올리는 색, 즉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 빛 바다, 초록으로 덮인 원시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분명 제주를 그렸음에도 말이다. 내가 알던 제주의 색과 다른, 낯선 흑백의 풍경에도 불구하고 그의 드로잉은 너무나 또렷하게 제주의 모습을 담고 있다.
김세연은 쉼 없이 지나가는 ‘지금'을 정지화면처럼 담아내는 작업을 한다. 작가가 몰입하여 탐구해 온 구름 그림들은 정해진 형태가 없고 끊임 없이 변화하는 흐름을 눈으로 쫓으며 감지한 시간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반면 그에게 자연은 이러한 시간의 흐름이 그 무엇보다도 쉬지 않고 가장 ‘자연스럽게', 그리고 무심하게 축적되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는 구름의 행방을 추적하며 지나가는 시간의 덧없음, 연약함 그리고 소멸하는 ‘지금'에 대한 단상을 담아내고, 제주의 자연에서는 무수한 찰나가 쌓여 만들어졌다가 변형되고 또 사라지는 생성과 소멸 과정 속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그것은 사계절의 색과 변화하는 것들을 모두 뒤로 한 채 마치 단단한 화석처럼 오랜 시간 남아 있는 유구한 어떤 것이다.
이렇듯 김세연은 이번 전시를 통해 무자비할 정도로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에 대응하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로 통합되는 그만의 태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구름 작업이 불가항력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에 맥을 짚어보듯 흔적을 남겨보려는 작가만의 방식이라면, 자연에서 발견한 형태와 패턴을 찾아 본연의 무게와 단단함을 묘사하는 것은 존재를 꿰뚫는 시간의 영속성에 경외심을 표하는 일이다. 이러한 태도들은 주어진 운명을 숙연히 받아들이되, 그 속에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의지라 할 수 있다. 색을 배제한 흑백의 재료만을 사용하여 대상을 그려내는 것도 이러한 의지에 힘을 싣는다. 휘발되는 외피를 넘어 좀 더 선명하게 대상과 그것의 본질을 바라보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3일간 바다가 보이는 제주의 숲을 흑색의 재료로 그려내는 대형 라이브 드로잉 퍼포먼스 또한 보는 이들이 실시간으로 표현되는 이미지를 따라가게 된다는 것과, 변하지 않는 본질을 품고 있는 자연을 소재 삼는다는 점에서 시간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을 잘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무성한 흑백의 숲에 둘러싸인 전시장에서, 우리는 저항할 수 없이 흘러가는 ‘지금’을 새겨 결국은 사라져버릴 우리 존재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동시에, 영겁의 시간이 축적된 대상들 앞에 서서 숙연한 마음으로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