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빛이 새어나오는 어느 집의 창문, 자주 다니는 산책로에서 눈이 마주친 오리, 햇살을 받아 유난히 눈에 띄는 청소기…김민수 작가는 오랜 시간 관계를 맺으며 지내온 대상들, 늘 주변에 있는 일상의 것들, 경험의 축적이 만들어낸 생경한 순간의 기억들을 화면에 담아낸다. 작가는 작업의 시작을 시각적 인상에 두되, 이를 최대한 배제하고 피부에 닿는 공기의 결, 어떤 내음, 스치며 지나간 움직임 등, 공감각을 통해 지속적으로 경험한 인상과 삶의 요소를 그려낸다.
작가가 화면에 표현하고 싶은 어떤 순간이나 인상의 포착은 꽤나 즉각적이다. 하지만 그는 순간의 인상을 바로 화면에 옮기지 않고, 전혀 다른 장소와 시간에 의해 지속적으로 그 포착의 순간이 환기되고, 획득한 인상이 강화되는 과정을 거친 뒤 비로소 꺼내어 그린다. 반복된 경험과 시간이 쌓이고 무르익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자주 입는 스웨터가 옷장에서 문득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은 그 옷을 입고 만났던 어떤 이, 혹은 날씨,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여러 장소들과 여러 시간에서의 기억, 경험인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낯선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여러 방식을 사용하는데, 아크릴이나 유화 등의 물감을 주재료로 삼지만 볼펜이나 스티커, 실, 종이 등의 재료도 자유롭게 화면으로 들여온다. 이미지의 바탕이 되는 화면 또한 메모지나 색종이를 여럿 이어 붙이거나 캔버스 천을 서로 포개어 만들기도 한다. 다양한 감각을 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치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작가는 어떤 대상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들로 얻은 인상을 구현하기 위해 색을 사용한다. 이는 사실 그대로의 재현이나 빛에 따른 색의 변화를 포착하는 인상주의의 방법과도 거리가 멀다. 그가 선택한 색에는 따뜻한 오후 식탁의 온도가, 어스름한 저녁 공기의 냄새가, 잠든 반려견의 조용한 새근거림 등 오감으로 취한 인상들이 담겨있다.
작가노트에서 김민수는 물리적인 시간과 기억 속의 시간, 그리고 마음이 느끼는 시간은 서로 다른 속도와 움직임을 갖고 있는 듯 하다고 말한다. 시계바늘이 일정한 속도로 다음 칸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마음과 기억은 수년을 거슬러 갈 수도, 도시와 바다를 건너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같은 대상이나 장소에의 서로 다른 시간과 인상이 중첩되고, 기억에 남은 감각들이 쌓여 어느 순간 특정한 색과 이미지로 오롯이 떠오르면, 작가는 여러 시간대의 경험들을 엮어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메를로 퐁티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체험'이고 이렇게 체험된 세상에는 단순히 지각된 경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생긴다고 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과거와 현재가 서로 이어진 그의 작업들은 시각적 이미지 이상의 어떤 의미를 보는 이들에게 선사한다. 언제 어디로든, 자신만의 시간과 장소를 찾아 들어갈 수 있는 열린 상태로 가는 길의 안내자가 되는 것이다. 가까운 일상에서, “익숙하지만 낯설게” 만나는 순간들은 과거와 현재의 나를 통합하며, 지나간 시간을 생생한 감각으로 느끼게 하고, 지금 숨 쉬는 이 자리와 시간의 가치를 더욱 살아있게 만든다.